제1회 노벨평화상은 시골 병원의 방 하나로 갔습니다

세상은 그를 잊었고 더러는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동안 그는 방 안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보호자께서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십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 작업복을 입고 계신 아버지, 손주를 안고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아세요?"

그 말씀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대개 짐작이 갑니다. 여기 들어오시면 그냥 할아버지 한 분이 되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살아오신 것이 전부 지워지고 남은 시간은 그냥 흘려보내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려면 말이 길어집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다가 한 사람의 마지막 열여덟 해를 알게 됐습니다. 이름은 웬만한 분이 다 아시는 사람입니다.

말년의 앙리 뒤낭. 1896년 이전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 웰컴 컬렉션, CC BY 4.0, 위키미디어 공용)
말년의 앙리 뒤낭. 1896년 이전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 웰컴 컬렉션, CC BY 4.0, 위키미디어 공용)

1859년 6월 24일, 사업 문제로 급히 길을 떠난 서른한 살

앙리 뒤낭은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는 사업가였습니다. 은행 일을 했고,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제분 사업에 손을 댔다가 자금 문제에 몰려 있었습니다.

1859년 여름, 그는 그 사업 문제를 풀려고 급히 북이탈리아로 향합니다. 국제적십자위원회가 펴낸 자료는 그때 그가 긴급한 사적 용무로 여행 중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도주의를 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 문제로 간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앙리 뒤낭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젊은 시절의 앙리 뒤낭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그가 닿은 곳 근처에서 그날 전투가 벌어집니다. 솔페리노 전투입니다. 열 시간 남짓한 싸움에 전사자가 6,000명을 넘었고 부상자는 30,000명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병 9,000명 이상이 인근의 작은 도시 카스틸리오네로 밀려들었습니다.

받아 줄 곳이 없었습니다. 뒤낭은 의학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며칠 밤낮을 그 도시의 큰 성당에 머물며 500명이 넘는 부상병 사이를 오갑니다. 물을 먹이고, 상처를 씻고, 붕대를 갈았습니다.

솔페리노 전투를 그린 장아돌프 보세의 그림. 1861년 살롱 출품작이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솔페리노 전투를 그린 장아돌프 보세의 그림. 1861년 살롱 출품작이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모두 형제다"라고 말한 사람은 뒤낭이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은 자주 잘못 전해집니다. 흔히 뒤낭이 투티 프라텔리(Tutti fratelli), 모두 형제다라고 외쳤다고들 합니다.

원문은 다릅니다. 1862년에 나온 『솔페리노의 회상』에서 그 말을 한 사람은 카스틸리오네의 여자들입니다. 뒤낭이 프랑스 병사인지 오스트리아 병사인지 전혀 가리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을 여자들이 그를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되뇐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뒤낭은 그 장면을 적으면서 카스틸리오네의 그 여자들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덧붙였습니다.

한 사람이 국적을 가리지 않으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따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멋진 구호를 외쳤다는 것보다 이쪽이 사실이고, 읽고 나면 이쪽이 더 오래 남습니다.

『솔페리노의 회상』 육필 원고의 첫 장. 1862년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솔페리노의 회상』 육필 원고의 첫 장. 1862년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두 해 만에 세계가 움직였습니다

돌아온 뒤낭은 그 며칠을 책으로 씁니다. 1862년 가을, 제네바에서 1,600부를 자기 돈으로 찍었습니다. 표지에는 판매용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팔려고 만든 책이 아니라 유럽의 군주와 장군과 의사와 문인에게 보내는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책에 담긴 제안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전쟁이 나기 전에 미리 구호단체를 만들어 두자는 것, 다른 하나는 부상병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을 국제 조약으로 보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적십자를 만든 다섯 사람. 가운데가 뒤푸르 장군, 왼쪽 위가 무아니에, 오른쪽 위가 뒤낭이다. 1863년 제네바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적십자를 만든 다섯 사람. 가운데가 뒤푸르 장군, 왼쪽 위가 무아니에, 오른쪽 위가 뒤낭이다. 1863년 제네바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1863년 2월 17일, 제네바에서 다섯 사람이 처음 모입니다. 뒤푸르 장군, 법률가 무아니에, 뒤낭, 의사 아피아, 의사 모누아르입니다. 이 모임이 오늘의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됩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던 사람이 그 무렵 유럽에 여럿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조약으로 밀고 간 것이 이 모임이었습니다.

이듬해 8월, 제네바에 16개국 대표가 모였고 1864년 8월 22일 협약이 서명됩니다. 서명한 나라는 12개국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네바 협약이라고 부르는 것의 첫 장입니다. 책이 나오고 두 해 만이었습니다.

1864년 제네바 협약의 첫 장 (사진: 국제적십자위원회,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1864년 제네바 협약의 첫 장 (사진: 국제적십자위원회,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1867년 4월, 그가 관여하던 은행 크레디 제네부아가 무너집니다. 알제리 사업에서 시작된 문제였습니다.

그해 8월 25일 그는 국제위원회 서기직에서 물러났고, 9월 8일에는 위원회에서 제명됩니다. 이듬해 8월에는 제네바 상사법원이 그 파산을 사기 파산으로 판단합니다. 그는 고향을 떠났고 다시는 제네바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그다음 스무 해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성깁니다. 파리, 슈투트가르트, 로마, 런던을 전전했고 한때는 거처가 없을 만큼 궁핍했다고 전해집니다. 위원회에 함께 있던 무아니에와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뒤낭의 여든두 해를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자료: 국제적십자위원회 발행 자료 및 하이덴 뒤낭 박물관 공개 자료)
뒤낭의 여든두 해를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자료: 국제적십자위원회 발행 자료 및 하이덴 뒤낭 박물관 공개 자료)

하이덴, 그리고 병원 위층의 방

1887년, 예순을 앞둔 뒤낭은 스위스 동쪽 끝의 작은 마을 하이덴에 닿습니다. 처음에는 여관을 옮겨 다녔습니다.

1905년 하이덴 마을의 그림엽서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1905년 하이덴 마을의 그림엽서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그리고 1892년 봄, 그는 마을의 구역병원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정확히 해 두어야 합니다. 이 병원은 양로원이 아니었습니다. 1874년에 문을 연 아펜첼 지방 최초의 병원이었고, 뒤낭은 환자로 입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물관 자료는 그를 하숙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치료를 받으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갈 데가 없어서 병원 위층에 방 하나를 얻어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여덟 해 동안 그 방에 있었습니다.

하이덴 구역병원의 그림엽서. 건물 벽에 병원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하이덴 구역병원의 그림엽서. 건물 벽에 병원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방을 나오지 않았지만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 건물에는 뒤낭 박물관이 있습니다. 전시실에는 붉은 벨벳 안락의자와 지팡이가 놓여 있습니다. 그의 방에 있던 가구 중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점이라고 합니다.

그 옆에 붙은 설명은 「영영 방 안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읽어 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점점 사람을 안 만나게 됐고, 말년에는 방 밖으로 아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설명이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그래도 그는 세상과 이어져 있었다고. 유럽 절반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고, 당대의 사회 문제를 붙들고 있었으며,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 엮였다고. 그의 요리사였던 사람은 교황이 한 번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뒤낭의 방에 있던 안락의자와 지팡이. 벽의 설명문 제목은 「영영 방 안에서」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의 재발견」이다 (사진: Mario Baronchelli,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뒤낭의 방에 있던 안락의자와 지팡이. 벽의 설명문 제목은 「영영 방 안에서」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의 재발견」이다 (사진: Mario Baronchelli,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실제로 그는 그 방에서 계속 썼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썼고, 1893년에는 국제 여성 연대를 만들자며 녹십자라는 이름과 도안까지 그렸습니다. 그 원고들은 지금 제네바 도서관에 청구기호를 달고 남아 있습니다.

방 하나가 그의 세계 전부였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방이 닫혀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이 성립합니다.

같은 병원, 1917년. 뒤낭이 세상을 떠나고 일곱 해 뒤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같은 병원, 1917년. 뒤낭이 세상을 떠나고 일곱 해 뒤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1895년 8월 7일, 기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이 세상은 그를 잊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895년 8월 7일, 게오르크 바움베르거라는 기자가 하이덴을 찾아옵니다. 장크트갈렌에서 나오는 신문 『디 오스트슈바이츠』의 편집장이었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던 뒤낭이 이 사람에게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합니다.

그해 9월 6일, 독일의 화보 잡지 『위버 란트 운트 메어』에 뒤낭을 다룬 기사가 실립니다. 이어 『디 오스트슈바이츠』에는 열다섯 차례 연재가 나갑니다. 소식은 유럽 여러 나라 신문으로 옮겨 실렸습니다.

1896년 독일 잡지 『디 가르텐라우베』에 실린 뒤낭 기사. 오른쪽 아래에 그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하이덴의 병원에 있다고 적혀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1896년 독일 잡지 『디 가르텐라우베』에 실린 뒤낭 기사. 오른쪽 아래에 그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하이덴의 병원에 있다고 적혀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이 이야기에서 제일 오래 붙들고 있었던 대목이 여기입니다. 그가 다시 발견된 것은 그가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대로 방에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찾아온 사람에게 그가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방에서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기자가 와도 기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같은 잡지에 실린 뒤낭의 초상 판화. 오토 리트만이 찍은 사진을 새긴 것이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같은 잡지에 실린 뒤낭의 초상 판화. 오토 리트만이 찍은 사진을 새긴 것이다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1901년 12월 10일, 제1회 노벨평화상

여섯 해 뒤, 제1회 노벨평화상이 그에게 갑니다.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와 공동 수상이었고 상금은 절반씩 나눴습니다. 그해 부문별 상금은 150,782 스웨덴크로나였습니다.

그는 그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군의관이 상금을 노르웨이 은행에 넣어 채권자들이 손대지 못하게 했고, 뒤낭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푼도 꺼내 쓰지 않았습니다.

뒤낭에게 수여된 1901년 노벨평화상 증서 (사진: 국제적십자위원회,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뒤낭에게 수여된 1901년 노벨평화상 증서 (사진: 국제적십자위원회,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1910년 10월 30일, 그는 그 방에서 여든두 해의 삶을 마칩니다. 유언에는 하이덴 병원에 가난한 주민을 위한 무료 병상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열여덟 해를 살았던 그 건물이었습니다.

장례 의식은 없었습니다. 시신은 취리히로 옮겨져 화장됐고 유골함은 며칠 뒤 조용히 안치됐습니다.

취리히 지흘펠트 묘지의 뒤낭 기념비. 1828년 5월 8일 제네바 출생, 1910년 10월 30일 하이덴 사망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 Paebi,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취리히 지흘펠트 묘지의 뒤낭 기념비. 1828년 5월 8일 제네바 출생, 1910년 10월 30일 하이덴 사망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 Paebi,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그가 살던 그 건물은 나중에 정말로 요양원이 됩니다

이 이야기에는 뒷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 하이덴의 병원이 새 건물로 옮겨 갑니다. 비게 된 옛 건물은 1969년부터 1993년까지 노인요양원으로 쓰였습니다. 1969년에는 1층 옛 엑스선실에 작은 기념실도 생겼고, 1998년에 그것이 박물관으로 넓어지면서 건물 이름도 뒤낭의 집이 됐습니다. 2024년에는 전시를 전부 새로 꾸며 다시 열었습니다.

그러니까 뒤낭이 방 하나를 얻어 열여덟 해를 살았던 그 건물은 나중에 실제로 어르신들이 사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같은 건물. 지금은 뒤낭 박물관이다 (사진: Mario Baronchelli,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오늘의 같은 건물. 지금은 뒤낭 박물관이다 (사진: Mario Baronchelli,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우리 법은 요양원을 무엇이라고 정하고 있나

여기서 한국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요양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감상이 아니라 조문에 적혀 있습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3조 제1항이 이렇습니다.

장기요양급여는 노인등이 자신의 의사와 능력에 따라 최대한 자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공하여야 한다.

—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3조 제1항

맡아 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사와 능력에 따라 살 수 있게 도우라고 되어 있습니다.

노인복지법 제2조 제2항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노인은 그 능력에 따라 적당한 일에 종사하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 받는다.

— 노인복지법 제2조 제2항

그리고 이 원칙은 시설이 실제로 해야 할 일로 내려옵니다.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조문시설이 해야 하는 것
고시 제6조 제2항급여계약을 맺을 때 수급자별 급여제공계획을 세우고 수급자 등(본인 또는 그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고시 제3조 제1항개인별장기요양이용계획서에는 장기요양 욕구·목표와 함께 수급자 희망급여가 들어가고, 급여는 그에 따라 제공해야 한다
고시 제43조 제5항 제2호인지기능 프로그램과 여가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제공한다
고시 제43조 제5항심리정서적 안정을 위해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고 기록한다
고시 제43조 제5항 제3호반기에 한 번은 가족이 직접 와서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노력한다
고시 제43조 제3항격리하거나 억제대 등을 사용해 신체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눈여겨보실 것은 수급자 희망급여라는 칸입니다. 어르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가 서류의 한 칸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 칸을 채우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양원은 잠깐 맡기는 곳이 아닙니다

뒤낭의 열여덟 해가 유난히 긴 이야기로 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쪽 숫자를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3년마다 하는 장기요양실태조사가 있습니다. 2022년 조사에서 시설급여를 받고 계신 분들께 지금 그 시설에서 얼마나 지내셨는지를 물었습니다. 740분이 답하셨습니다.

지금 시설급여를 받고 계신 분들이 그 시설에서 지금까지 지내신 기간입니다 (자료: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2년 장기요양실태조사」 표 3-76, 응답 740명)
지금 시설급여를 받고 계신 분들이 그 시설에서 지금까지 지내신 기간입니다 (자료: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2년 장기요양실태조사」 표 3-76, 응답 740명)

1년이 안 된 분이 17.7퍼센트, 1년에서 2년 사이가 21.1퍼센트입니다. 나머지 61.2퍼센트는 이미 두 해를 넘기셨고, 그중 21.1퍼센트는 다섯 해를 넘기셨습니다. 열 분 중 여섯 분이 두 해 넘게 그곳에서 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숫자를 읽으실 때 한 가지만 감안해 주십시오. 이건 다 지내고 나온 기간이 아니라 조사하던 날까지 지내신 기간입니다. 조사받으신 분들은 그때도 여전히 그 시설에 계셨으니, 이분들이 결국 머무시게 될 기간은 표에 적힌 것보다 깁니다. 반대로, 오래 계신 분일수록 조사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점은 이 숫자를 부풀리는 쪽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이 표를 평균 재원기간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2019년 조사와 견주면 1년 미만과 1~2년 구간이 줄고 2년 이상이 늘었습니다.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2026년 8월 6일에 나온 「2025년 장기요양실태조사」 보도자료를 보면, 시설급여를 받고 계신 분들 가운데 입소 전에 혼자 사시던 분이 59.3퍼센트였습니다. 2022년 조사의 37.3퍼센트에서 크게 늘었습니다. 상세 보고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읽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시설이 사람을 세상에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혼자이던 분이 오시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남은 몇 해를 어떻게 지내시게 하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법이 시키는 것과, 법이 시키지 않는 것

여기서 솔직하게 적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시 전문과 서식을 훑어봐도 어르신이 살아오신 이력을 알아 두라는 문구는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식사에 관한 조항의 "수급자의 기호"이고, 이용계획서의 "수급자 희망급여"입니다. 법이 요구하는 선은 기능과 욕구까지입니다.

그 위는 법이 아니라 지침이 말합니다. 보건복지부 「노인복지시설 인권보호 및 안전관리지침」은 입소 계약 단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입소 계약 시 당사자(시설, 노인, 보호자 등)들은 노인이 시설생활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기본적인 정보(노인의 성격, 취향 등)를 나누며…

— 보건복지부 「노인복지시설 인권보호 및 안전관리지침」

같은 지침은 생활 단계에 대해서도 헤어스타일이나 의복 같은 개인적 생활스타일을 스스로 정할 수 있게 하라고 적고,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는 "노인의 삶의 방식 등 문화적 차이와 생활양식의 차이를 최대한 존중"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요양시설 평가지표에는 「수급자존중」이라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그 안에 개별욕구존중과 통합적사정 같은 항목이 점수로 들어가 있습니다.

법이 요구하는 선은 기능과 욕구까지입니다 (자료: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3조, 보건복지부 고시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 보건복지부 「노인복지시설 인권보호 및 안전관리지침」, 「장기요양기관 평가방법 등에 관한 고시」 별표1)
법이 요구하는 선은 기능과 욕구까지입니다 (자료: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3조, 보건복지부 고시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 보건복지부 「노인복지시설 인권보호 및 안전관리지침」, 「장기요양기관 평가방법 등에 관한 고시」 별표1)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법이 시키는 데까지만 해도 위법은 아닙니다. 그 위를 하는 곳과 하지 않는 곳이 갈릴 뿐입니다. 그래서 보호자께서 물어보실 수 있는 자리도 바로 거기입니다.

Q. 어머니가 시설에 들어가시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계시게 되는 건 아닌가요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그건 시설에 들어가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실 것이 없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확인하실 것은 프로그램이 있느냐가 아니라 어머니가 하실 만한 것이 있느냐입니다. 프로그램은 법이 요구하는 항목이라 어디에 물으셔도 답은 나옵니다. 갈리는 것은 그것이 어머니에게 맞느냐입니다.

그리고 그건 시설이 어머니를 알아야 정해집니다. 평생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신 분과 평생 사람을 상대하신 분은 하실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위에 적은 대로 그 이력을 알아 두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시설이 알아낼 방법은 사실상 하나뿐입니다. 가족이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Q. 어느 요양원에 전화하셔도 물어보실 것

저희와 상관없이 그대로 쓰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전화를 걸기 전에 공단 자료에서 미리 확인해 두실 수 있는 것들은 요양원 고르는 법에 따로 모아 두었습니다.

  1. 입소할 때 급여제공계획서를 어떻게 쓰는지, 그 자리에 가족이 함께 앉는지 물어보십시오. 고시 제6조 제2항은 계획을 세우고 동의를 받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2. 여가프로그램과 인지프로그램이 주에 몇 번인지, 그리고 그중 어르신이 실제로 참여하시는 것이 몇 개인지 나눠서 물어보십시오. 두 숫자가 많이 벌어지면 이유를 물어보실 만합니다.
  3. 심리정서 상담을 누가 얼마 간격으로 하는지 물어보십시오. 기록으로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4. 가족이 와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반기에 한 번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최근에 한 것이 언제였는지도 함께 여쭤 보시면 답이 분명해집니다.
  5. 어르신이 살아오신 이력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 두시는지 물어보십시오. 법에 없는 항목이라 답이 갈립니다. 그래서 오히려 잘 드러납니다.
  6. 면회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방 안에서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바깥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몇 개인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저희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부추꽃더클래식 너싱홈에서는 어르신이 무언가를 안 하려 하실 때 옆에 앉아 설득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봅니다. 식사를 미루시거나 목욕을 마다하시는 순간에 그냥 넘어가느냐 한 번 더 여쭙느냐가, 며칠이 쌓이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필수 프로그램 말고도 산책 같은 것을 할 수 있게 인력을 두는 이유도 같습니다.

면회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하실 수 있습니다. 낮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는 직원 식사 시간이라 출입과 외출이 어렵습니다. 1인실을 쓰시는 어르신은 방 안에서 시간 제한 없이 여섯 시까지 함께 계실 수 있고, 로비와 지하 광장도 그 시간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하실 수 있는 것 두 가지를 적어 두겠습니다. 둘 다 돈이 들지 않습니다.

첫째,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종이 한 장에 적어서 시설에 건네 보십시오. 하시던 일, 잘하시던 것, 질색하시는 것, 자주 하시던 말, 좋아하시는 노래. 이건 감상적인 일이 아니라 실무적인 일입니다. 위에 적은 수급자 희망급여 칸을 채우는 재료가 됩니다.

둘째, 면회 가실 때 바깥 소식을 가지고 가 보십시오. 손주 이야기, 동네 이야기, 뉴스 이야기. 뒤낭에게 편지가 하던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바깥일은 누가 가지고 들어와야 알게 됩니다.

부모님을 시설에 모신 것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그건 그만큼 신경을 쓰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자주 못 오시는 데는 대개 사정이 있습니다. 거리가 멀거나, 몸이 성치 않거나, 벌이를 놓을 수 없거나 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오시게 됐을 때 무엇을 들고 오실지는 정하실 수 있습니다.

뒤낭이 다시 발견된 것은 그가 방을 나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그가 여전히 무언가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 방에도 그 두 가지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자료

앙리 뒤낭 『솔페리노의 회상』(1862, 프랑스국립도서관 디지털본) / 국제적십자위원회 발행 자료 「솔페리노에서 제네바 협약까지」(프랑수아 뷔뇽) / 1864년 제네바 협약 원문 및 국제적십자위원회 국제인도법 조약 데이터베이스 / 하이덴 뒤낭 박물관 전시 설명 및 공개 자료 / 『위버 란트 운트 메어』 1895년 9월 6일자 뒤낭 기사 / 『디 가르텐라우베』 1896년 675면 뒤낭 기사 / 노벨재단 1901년 평화상 공식 기록 및 연도별 상금 자료 /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2년 장기요양실태조사」 표 3-76 / 보건복지부 「2025년 장기요양실태조사」 결과 보도자료(2026년 8월 6일 배포) /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3조 / 노인복지법 제2조 / 보건복지부 고시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 제3조·제6조·제43조 / 보건복지부 「노인복지시설 인권보호 및 안전관리지침」 / 「장기요양기관 평가방법 등에 관한 고시」 별표1 장기요양기관 평가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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